written by 샤이
07. 13. 2017
BGM. 류이치 사카모토 - Opus
W. Shakespear의 Sonnet 18 인용
더할 나위 없이 나른한 오후. 권태롭기만 한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시끄럽게 귀를 울렸다. 여전히 떠들썩한 교실을 메우는 답답한 공기가 폐부에 스며들었고, 이내 뜨거운 숨결이 뱉어졌다. 7월, 지독한 여름날의 연장선이었다.
나는 여름을 싫어했다. 그러나 나를 만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여름과 같다 비유하곤 했다. 초여름에 태어난 게 그 이유라 하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것을. 그들은 말로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여름만이 자아내는 그 무언가와 내가 쏙 빼닮았다 말을 했다. 파고들려 할수록 그들은 말을 얼버무렸다. 그냥. 그런 게 있어. 그러곤 내게 씨익 웃어보였다.
허나 막상 나는 여름을 전혀 좋아할 수가 없었다. 따갑게 내리쬐는 태양. 절로 숨이 막혀오는 텁텁한 대기. 부딪치는 살갗의 열기. 그로 인해 끝을 향해 치닫는 불쾌지수. 좋아해줄 만한 요소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여름이 내게 주는 갑갑한 인상과 내가 혹여 겹쳐 보일까. 항상 고민하며 남몰래 앓아왔었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매 여름이 다가올 때마다 나와 잘 어울린다는 그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은 나를 아니꼽게 투욱, 툭 건드려왔다. 워낙 자주 듣는 말이라 그럴 때면 이젠 나도 애써 가볍게 웃어넘겨버리고 말지만.
그런데 오늘은 어떠하냐 물으면 그것조차 못해줄 것 같단 확신이 들 정도로 상태가 온전치를 못했다. 오늘마저 그 말을 듣는다면 쉬이 넘길 순 없을 만큼. 기분이 마냥 좋질 않았다. 하물며 전기를 아끼자는 학교의 방침 아래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는 지금, 온 신경이 곤두서 겨우 억눌러왔던 짜증이 주체할 수 없이 치솟고 있었다.
작은 창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오는 후덥지근한 바람이 기분 나쁘게 나를 훑었다. 왜소한 몸집을 가리려 여름에도 긴팔을 선호하는 나였지만, 한낮의 뙤약볕한텐 그저 두 팔을 들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웬만해선 항상 걸치고 있는 회색 카디건도 오늘은 저 멀리 벗어둔 지 오래였다. 끝까지 잠겨 목을 죄어 오는 셔츠 단추를 아무렇게나 풀고는 턱을 괴었다. 그리곤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무시하려 두 눈도 마저 질끈 감았다.
도저히 더 이상은 이 무더위와 이유 모를 짜증을 감내할 수 없을 것 같단 판단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번 수업이 끝나자마자 녀석과 학생회실로 도피하자. 그렇게 단단히 벼르며 길지 않을 단잠에 빠져들려 했던 찰나, 그의 이름이 불렸다. 들러붙은 눈꺼풀 속에 숨은 동공이 빠르게 생기를 되찾으며 내 온몸을 결박해오던 늘어진 몽롱함에서 나를 깨웠다.
지금이 무슨 시간이더라. 자발적인 학생이 좋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던 선생님은 그에게 낭독을 권유했다. 문학 시간이지, 참. 그나저나 민현이가 자발적이라고? 어느 무리에나 잘 섞이긴 하나 대놓고 눈에 띄는 건 꺼려하는 녀석인데.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스치자 우려가 앞섰다. 혹시 나처럼 더위라도 먹은 걸까 하고서. 그러다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럼 되려 학생회실로 피신하잔 유혹은 잘 먹힐 지도 모른다. 그리 여겨져서.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앉아 그를 바로 보았다.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내 그대를 여름날에 비할까?)
Thou are more lovely and more temperate.
(그대는 여름보다 더욱 사랑스럽고 온화하다.)”
시선이 그에게 닿자 그 역시 나를 응시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한 구절, 한 구절을 느릿하게 읊는 나지막한 목소리와 그만의 특유의 발음이 얽혀 귓가를 두드려왔다. 무언가 익숙하다 느끼던 순간, 한 달 전 학생회실에서 내게 했던 그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 * *
“현아. 곧 배우게 될 시, 읽어봤어?”
“아니.”
그걸 왜 벌써 읽어. 아직 한참 남았는데. 갑작스레 밀려든 학생회 업무에 시달리느라 뻐근한 어깨를 풀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며 크게 웃었다. 괜히 무안해져 뒷머리를 긁적였다.
“닮았어, 너랑.”
“제목이 뭔데?”
“Sonnet 18.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
“내 그대를, 여름날에 비할까.”
그가 말해준 제목은 문학 교과서의 심화 부분에 실린 한 영시였다. 학기가 시작되고 처음 책을 받아 훑어볼 때, 이질적이라 페이지 정도는 나도 눈여겨봤었는데. 고전시가와 닮아 있지만 차이도 있는 운율시라서 게재된 거라 설명되어 있던 그 페이지를. 물론 우리나라의 고전 시만큼 현대의 영어 어휘와 문법과는 달라 자세히 읽어보진 않았지만.
긴장과 기대가 섞인 울림이 가슴께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그의 시야 속 나는 어떤 모습일까. 관심을 두고 던진 질문의 답이 돌아오자 들뜬 마음이 순식간에 차분하게 식었다.
“…뭐야. 이제 너마저도 나랑 여름이랑 엮는 거야?”
그에게만 드러낼 수 있는 나의 어린 투정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또 티는 나지 않게 쓰게 웃곤 화제를 돌렸을 텐데. 눈을 가늘게 뜬 채 볼멘 말투로 투덜대자 그가 내게 다가와 달래듯이 내 머리를 살살 어루만지며 작게 웃어보였다.
* * *
이거였구나. 그가 꽤 흥미를 가졌던 시인 터라 나 역시 구미가 당겼다. 의자를 똑바로 해 책상 위에 펼쳐진 시를 스륵 눈으로 살폈다. 그때완 달리 보고 듣기만 해도 얼추 해석이 가능할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직접 입으로 읽을 정도라면 정말 마음에 든단 얘긴데. 애인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알아듣지 못하면 그만한 창피도 없을 것 같아 내심 걱정을 하던 참이었다.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열없지만 진지함이 배어나는 그의 목소리에 다시 몰입했다.
“Rough winds do shake the darling buds of May,
(거친 바람이 오월의 사랑스런 꽃봉오리를 흔들고,)
And Summer's lease hath all too short a date.
(여름의 약속은 너무 짧기만 하다.)
Sometime too hot the eye of heaven shines,
(때로 천국의 눈은 너무 뜨겁게 눈부시고,)
And often is his gold complexion dimmed.
(종종 그의 금빛 안색은 흐려지고 만다.)
And every fair from fair sometime declines,
(모든 아름다움은 저물고,)
By chance or nature's changing course untrimmed.
(우연히, 또는 자연의 순리에 의해 늙는다.)
But,
(그러나,)”
멈칫, 그가 호흡을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그는 상냥함이 어린 두 눈에 나를 가득 담은 채. 나와 시선을 맞추며 천천히 낭송을 마저 이어갔다.
“But thy eternal Summer shall not fade.
(그러나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결코 바래지 않으리라.)
Nor lose possession of that fair thou owest,
(그대가 소유한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Nor shall Death brag thou wanderest in his shade,
(결코 죽음이 그대가 그의 그림자에서 거닐고 있다 으스대지 못하리라,)
When in eternal lines to time thou growest.
(불멸의 시 안에서 그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져만 간다.)
So long as men can breathe, or eyes can see,
(사람들이 숨을 쉬는 한, 눈으로 보는 한,)
So long lives this, and this gives life to thee.
(이 시는 오래도록 살아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라.)”
그는 손에 들려 있는 교과서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올곧이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서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던 그의 다정한 눈빛과 애정이 어린 시상이 끝을 맺음에 따라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화륵 달아올랐다.
수업 시간이란 사실도 망각하고선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허나 곧 아이들의 수군거림과 선생님의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를 눈치 채 귀 끝까지 그 붉음이 번져갔다. 왜 그러니, 종현아?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하핫. 겨우 정신을 차리곤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야, 자다 깼냐? 키득거리며 뒷자리에 앉은 민기가 놀리듯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부끄러워하거나 자책할 새도 없었다. 끓어오르는 벅찬 감정이 도무지 진정되지를 않았다. 이렇게 설레면 어쩌자는 거야, 도대체. 이마를 짚은 채 창밖을 바라보며 격렬하고 어지러이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수습하려 했다. 후우, 후우. 평소보다 조금 거칠어진 호흡을 가라앉히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몇 차례나, 그 행동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시간상 전부 해석해줄 순 없지만, 이 시의 내용은 사랑하는 연인, 혹은 다른 어떤 대상을 찬양하는 내용이야.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때때로 시들지언정 당신의 영원한 여름만큼은 시들지 않으리. 이 당시 때는 그런 시상들이 주를 이뤘고-.”
허나 선생님이 덧붙인 짤막한 설명에 결국 멍하니 넋을 놓아버렸다. 뒤에 이어지는 설명은 들리지도 않았다. 얼마 안 가 기어이 모든 해설을 놓친 채. 허무히도 수업은 끝이 나고 말았다.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진 교실엔 장난기가 서린 아이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야, 김종현. 체육복 갈아입으러 안 가냐? 덥다며 떨어지라고 제 목에 걸쳐진 팔을 찰싹찰싹 때리는 민기와 그 팔의 주인인 동호가 아야-거리면서도 팔은 치우지 않은 채 다른 손엔 체육복을 들고선 나를 향해 서 물었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레 시선을 돌려 반의 서기인 영민과 조곤조곤 말을 나누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있다 갈게. 먼저 가 있어. 빙긋 웃으며 짧게 거절을 표하자 알겠다 말하곤 둘은 부산스레 투닥거리며 교실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어느새 아이들이 다 빠져나간 교실엔 다시 수업 때처럼 정적이 일었다. 긴장이 풀려 짙은 숨을 뱉곤 쨍한 햇볕에 흐물흐물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힘없이 몸을 추욱 늘어트렸다.
“종현아.”
그러나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또다시 심장이 터질 듯 뛰어 온몸이 경직되고 말았다.
“현아.”
천천히 그를 바라보자 그의 입술에 다시 다정스레 내 이름이 맺혔다. 그리곤 멋쩍어하는 듯 내 시선을 피한 채 그가 뺨을 긁으며 재차 입을 떼었다.
“…별로였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팔에 얼굴을 묻고선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절-대. 내가 질색하는 여름에 덧대어지는데도, 전혀 싫지가 않았다. 내가 네게 여름보다 더 사랑스러운 존재로 치부될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것도 없이 행복하다 여겼을 만큼. 내 지긋지긋한 속앓이가 도리어 하찮게 여겨질 정도였다.
허나 수줍은 어린 소녀가 느낄 법한 이 낯 뜨거운 감정을 입 밖으로 내뱉을 용기는 단연코 없었다. 그렇기에 어떠한 말도 그에게 전할 수 없어 입술을 꾹 다물어버렸다.
“갈까?”
그러나 그는 전혀 서운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표현에 미숙한 나를 안다는 듯 먼저 말을 건네어주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내게로 내민 손을 살며시 맞잡았다. 잔향처럼 남아있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손바닥에서 온전히 느껴지는 듯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학생회실로 그와 함께 걸어가다 체육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올 테니 먼저 가 있으란 그의 말에 그제야 땀에 흠뻑 젖은 두 손을 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앉아 습관처럼 에어컨을 틀었다. 나에게로 소소히 불어오는 찬바람에 기분 좋게 눈을 감으려다 책상 위에 놓인 프린트물이 눈에 들어왔다. 무의식적으로 집어 들어 내용을 찬찬히 확인하자 그 시라는 것을 알아채었다. 그의 것이라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어른들이 쓸 법한 글씨체로 빼곡하게 적혀 있는 흔적에서 그를 찾은 것이었다. 그의 필기를 하나하나 살펴보다 문득 끄트머리에 적힌 두 문장에 시선이 박혔다.
‘여름은 한없이 열렬하고 덧없이 사랑스러워. 내게 네가 그래. 아니, 오히려 더.’
‘종현이에게 읽어줄 것.’
읽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짧은 두 문장을 마음 속 끄트머리에 똑같이 새겼다. 여름이, 좋아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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